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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의 지명에 대하여

이석배 선생님의 대가야 지명을 소개한다.

기사입력 2019-10-21 오후 2:46:4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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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인터넷뉴스]

고령 대가야읍은 내가 유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건강이 무너진 청년시절에 절망의 시간을 보내며 미래를 꿈꾸던 곳이기도 하다. 나는 고령에 갈 때마다 묘한 환타지아의 세계에 빠지곤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살던 곳 마을이름을 들을 때 마다, 신기하게도 숨어있는 세상의 얼굴 내밀기 때문이다. 만약에 토지를 집필한 박경리 선생이 고령에서 태어나거나 자라났다면, 저 유명한 로마신화 율리시즈(Ulysses)를 뛰어 넘는 오디세우스(Odysseus) 이상의 무용담이 펼쳐졌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대가야왕국이 신라에게 멸망하고, 대가야를 함락한 신라가 고려에게 멸망하고,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가 조선에게 멸망하고, 조선이 일제에게 점령당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가야국 땅의 지명과 그 후손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생명과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들이 살아온 삶과 숱한 이야기가 바람결에 흘러가다 몽골초원을 지나 흥안령산맥을 돌고 바이칼호수를 가로질러 백두대간을 지나 다시 가야산 계곡을 내려오면 그들의 혼이 다시 살아나서 대가야의 숨겨진 이야기를 전해줄 것이다.

 

 

대가야(고령)의 지명

대가야왕국으로 들어오는 주요 길목은 크게 4곳이다. 내륙지방 북쪽으로부터 들어오는 길은 성주 용암을 지나 무라이 고개를 넘어오는 길이 첫째요, 성주 가천에서 대가천(대개천)”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 둘째요, 남쪽에서 들어오는 길은 야로에서 토끼재를 넘어오는 길과, 낙동강지류 모듬 내를 따라서 올라오는 알터앞을 지나는 길이다. 이들 중에 가장 주요한 출입구는 모듬내의 강 길이었으리라 본다. 고령의 지명은 이 주요도로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대가야국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지명들의 일부분만 살펴보면 1800여 년 전 대가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주산 : 우리민족(조선)의 분포는 흔히들 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눈다. 북방계는 고구려와 백제를 들고 남방계는 신라와 가야를 지목한다. 가야와 신라는 동남아시아 지역이 아닌 파미르고원지역에서 이주한 투르크 계열족속이고, 고구려와 백제는 바이칼부근 몽골지역에서 이주한 만주족속이다. 만주족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얼굴형이 둥글지만, 투르크 계열은 피부색이 대체로 희고 콧날이 높으며 얼굴이 갸름한 서구 형에 가깝다. 가야의 조상들은 빙하시대 말기에 빙하가 녹으면서 저지대의 홍수 사태를 피하여 산맥을 따라 이곳까지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의 조상들은 고조선 연맹의 일원으로서 조선이라는 지명이주잔’ ‘주센’ ‘주즈등으로 불리던 지명을 정착지에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는 12가야연맹의 수장으로서 가야산을 중심으로 천재(天齋)의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였고 이때에 주산에서 연맹회의를 개최하면서 이곳의 지명을 주산으로(음차식 표기) 부르며 연맹의 중심임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금산 : 금산의 한문이 金山이 아닌 錦山으로 쓰인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야인들이 원적지에서 이주하며 가져온 고향지명 금산(金山), 투르크어로는 알툰만주어로는 알타이로 표기되는데, 의 뜻은 빛, 광명, 태양, 황금을 상징하여, ()은 만주 쪽에서는 ’(ㅅ의 구개음화) , 타이로 변형되어 알툰=알타이=황금산으로 불리며 한문 식 金山으로 표기하던 것을,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후 그 격을 낮추어 한문의 뜻을 황금에서 비단으로 부르게 했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무역선이 중국을 비롯한 인도나 아라비아 등지 의 비단과 금세공품등 귀중품을 싣고 와서 대가야국과 교역을 할 때 비단과 귀한 상품을 보관한 창고나 교역장소가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김정민 박사 참조)

 

알터 : 난생설화의 땅이 아닌 알리는 터로 본다. 대가야국의 출입의 가장 중요한 관문인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무역선이나 사신들이 객기(손터)’를 거쳐 대가야국으로 들어오면, ‘회천안림천이 만나는 모듬내강가 요충지에 위치한 이곳에서 조정과 왕궁에 그 소식을 알리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장소로 본다. 또한 모듬내를 오르내리는 모든 선박들이 입출항 사실을 알리는 터, 오늘날 대가야국의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어부실 : 금산 재 넘어 북쪽기슭에 있는 어부실(漁夫室)은 지금의 회천(回川 : 가천 수륜에서 흘러내리는 대가천과, 덕곡에서 흘러내리는 소가천과, 낫질에서 흘러오는 내곡천이 합수하면서 물이 빙빙 돌아서 생긴 지명) 강가의 지명인데, 대가천과 소가천과 내곡천의 3개천이 합수하는 장소 바로 아래에 위치한 이곳은, 은어와 누치 메기 등 민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이므로 이를 생계수단으로 하는 어부들이 많이 살던 곳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본다.

 

구름 : “구름마을과 그 골짜기는 예부터 도자기를 많이 굽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임진왜란 때 마을사람들 모두가 왜국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때부터 구름에는 도자기 장인이 사라졌다고 한다. 대가야국 시절에는 이곳에 도자기 굽는 가마터가 많이 있던 곳으로 전해지고, 항상 도자기 굽는 도요에서 나는 연기가 골짜기에 구름처럼 가득차서 구름이라고 불리던 곳이기도 하고, 마을 아래가 물의 온도가 각기 다른 대가천, 소가천, 내곡천이 합수하는 곳이어서 항상 물안개가 피어올라 멀리서 구름처럼 보여 생긴 이름일 수도 있다.

 

나 어릴 때(1960~1970년대)에도 땔감을 나무로 사용하던 시절이라 아침과 저녁에는 연기가 구름처럼 마을 위에 가득했다.

 

정뱅이 : 지명에 붙는 “~~뱅이라는 지명은 방어방비하는 장소의 지명으로 많이 사용되고, 물산 물류기지의 집합소로도 쓰였다. 지명 “~뱅이의 특징은 강가산마루의 재등에 분포하는데, 교통이나 군사요충지에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군대에도 “~뱅이 친다라는 언어가 존재한다. 추측건대 정뱅이는 대가야국 시절에 대가야국의 주력 방어부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신라장수 이사부가 대가야국에 쳐들어 올 때, 대가야 군대는 대벌(갱분)에서 크게 저항하다 패하고, 이곳(정뱅이)에서 마지막 저항하다가 밀려나서 미나릿 골(멸라)”에서 전멸했다고 한다. 또한 대가야 시절에는 낫질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이 지금처럼 회천으로 바로 흘러내린 게 아니고, ‘정뱅이마을 앞에 있는 큰 소()를 지나 구름쪽으로 흘러가다가 (부대 앞에 회자가 있었으니 당시에는 천혜의 요새였을 것으로 보임) ‘날키앞에서 대가천과 소가천이 합쳐서 흘러내리는 강물과 합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물은 항상 빙빙 돌았으므로 회천이라고 하였는데, 1938년 병자년 수파 때 강줄기가 바뀌고, 큰 소()는 메꾸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나이 많은 분들은 정뱅이 마을 앞을 쏘안들, 윗 정뱅이 앞을 쑥박들(숙박들)이라 부른다.

 

옴뱅이 : 정뱅이에서 동쪽으로 500미터 지점인 회천강가에 위치한 마을이 옴뱅이(옮뱅이)’인데, 대가야의 방어부대나 왕실수비대는 정뱅이에 있었고, 회천과 대가천등을 오르내리며 순시하면서 치안을 유지하는 부대 (‘옮겨 다니는 부대’), 대가천과 소가천, 내곡천과 안림천을 오르내렸던 대가야국의 수군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추정되며, 혹은 수상교통의 요지여서 대가야국 무역의 물류기지가 존재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꼭두뱅이(용산) : 대가야국의 군부대 우두머리와 지휘소가 존재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우륵기념비가 서있는 장소이며, ‘꼭두뱅이로 불리는 이 산 이름을 용산(龍山)’이라고 불리는데, ‘용산에서 정뱅이옴뱅이’ ‘고숙골이 한눈에 훤히 보인다. 대가야국의 대장군은 이곳에서 군부대의 동향을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부대 움직임을 간파하고 지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꼭두뱅이에서 주산으로 오르는 산등성이의 북쪽 기슭은 몹시 가파르고, 1960~80년대 까지도 성터와 고분이 여러 곳 있었는데 도굴의 흔적도 많았다.

 

이곳에는 장군 샘이 우륵기념비 서남쪽 30미터 지점에 존재하고 있고, 장군에게 물을 드릴 때 샘 옆에 자라는 박하 잎 한 잎씩을 물그릇에 띄워서 바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어릴 때, 이 샘가에서 자라는 박하풀잎을 늘 보아왔고 그 잎을 따서 손바닥에 비비고 놀았다. 나 이외에도 고령농고 출신들의 수많은 증인이 있다.

 

용산(꼭두뱅이) : 현재 우륵기념비가 서있는 산을 용산이라고 부르는데, 산의 생김새가 용이 웅크린 모양으로 용산의 꼬리는 정뱅이 쪽으로 길게 뻗어 있고, 용산의 머리는 낫질 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낫질에 큰 부자가 많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이 용산 정기를 받은 너무 큰 인물이 날 것을 염려하여, 꼬리의 혈맥을 자르는 조치를 취하였다고 한다. 낫질에서 흘러오는 물은 용산옆을 흘러 큰 소()를 이루면서 정뱅이앞을 지나 날키로 흘러갔다고 한다.

 

1880년대 말경부터 정정골에 이주하여 터를 잡고 살아오셨던 함안 조씨 조이암()께서 살아계실 때, 그분의 손주이자 나의 친구인 조병간에게(1955년생) 직접 목격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936병자년 수파에 큰물이 나서 용산의 꼬리부분이 잘려서 떠내려가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그때 떠내려간 산이 날키옥산이 되었다고 하셨다. 그때 이후 물길도 바뀌었고, 용산 머리 부분의 돌을 잘라낸 돌로 오리방천의 긴 석축을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우륵기념비는 머리와 꼬리가 잘려 나간 용산몸통 위에 서있는 것이다.

 

고숙골 : 정뱅이 마을 서쪽 500여 미터 뒤의 공동묘지 옆의 골짜기 이름인데 아마도 대가야국 군사들을 훈련시킨 훈련소가 있던 장소로 추정된다. “고도로 숙달시키는 골짜기가 고숙골(高熟谷)로 불렸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날키 : 가천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대가천과 덕곡에서 흘러내리는 소가천이 옥산 아래에서 합수하여 남으로 흐르는 강줄기에, 낫질골짜기에서 정뱅이 앞을 지나오는 내곡천이 동북으로 흐르며 가천 물줄기를 치받으며 합수하게 되니, 키질에 튀어 오르듯 물이 튀어 오르는 곳이라 하여 생긴 지명을 날키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 앞은 삼천(三川)이 합수하여 항상 강물이 빙빙 돌면서 흐르고, 물에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어 사고가 잦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1920년대 병자년 수파 때에 물길이 바뀌어 그 이름만 남아 있다.

 

연조동 : 대가야왕국의 도읍 성 중심지이자 조정이 있던 곳으로 전해진다. 왕이 거처하던 봉두골 아래에 있던 왕궁 옆에는 왕이 마시던 왕정이 있었다.

 

6국의 가야는 연맹체로 움직였다고 전해지는데, 해마다 흩어진 분국들이 모여서 쿠릴타이(Khuriltai) 대 회의를 이곳에서 진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봉두골 : ‘봉의 머리는 왕을 칭하므로 왕의 처소가 있던 곳으로 보인다. 왕궁의 서쪽과 동북과 서남방 3면이 주산성이 감싸고, 동쪽에는 회천강물이 회자를 이루고 있으며 강의 동쪽은 높은 산(금산)이 둘러싸고 있으므로, 과히 천혜의 요새에 대가야의 왕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솟질(솥질) : 솏다, 삯질, 솟구질 등의 가설로 지명의 유래를 추정 해보면,

솏다’ ‘솏구질하다로 풀어보면, “여럿 중에서 골라내다(뽑아내다)”라는 의미로 쓰였던 지명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대가야 왕궁을 들어오는 주 출입구에 위치한 곳이니 만큼 간자를 골라내는 검문소나, 거래품의 세금을 징수하는 관청이 있던 곳으로 볼 수 있고,

 

삯질로 풀어보면, 대가야국을 상대하는 무역선이나 교역선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배를 상대로 삯을 받고 일하는 곳으로도 볼 수 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가 물살이 센 여울을 만나면 배에서 앞 닻줄을 내려서 강기슭에서 끌고 올라가거나, 배에서 긴 장대를 강바닥에 내려서 배를 밀어 올리는 방법을 쓴다. 이것을 솟고질’ ‘솟구질혹은 솟질한다고 한다.

 

아마도 마을 앞 회천 여울의 경사가 급하여 배를 솟질하던 곳에서 유래된 지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솟질 마을 앞의 강물 흐름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치사리 : 치사리는 사리분별을 다스리는 곳으로 본다. 그 시대에는 행정과 사법이 구분되지 않았으니, 일반 백성을 상대한 관청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치사리에 관청이 있었다는 구전은 옛 부터 전해지고 있는 것을 고령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한문 표현도 治事理가 맞을 것 같다.

 

객기(손터) : 낙동강 본류에서 회천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이 마을 객기(客基)는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항해에 지친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곳이자, 강물 흐름과 각 왕국과 고을의 최신정보를 얻고자하는 손님들로 북적대는 객관이 있던 교통의 중심지로 추정된다.

 

귀원 : ‘모듬내에서 서쪽에서 유입되는 안림천으로 강을 오르면 귀원이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귀원(歸願)’고향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본다. 이곳에는 대가야와 교류하는 외국인들이 거주한 흔적이 있다. 삼국시대의 교류는 물물교환이 대부분이었는데 때로는 물품대금의 인질로 억류되는 경우가 종종 있고(견질 담보로 억류시킨 상인이 파산하거나 배가 침몰하면 재산으로 취급되어 종으로 전락한다), 선진문화를 전수하는 등 여러 사정으로 대가야국에 귀화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본다.

 

귀원(貴園)’귀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강가의 수려한 풍광이 좋은 마을에 귀족들이 거주한 마을로 유래한 지명으로 본다. 혹은 귀원(貴元)은 가야연맹의 귀족의 자제들이 모여서 학문을 연마하였던 마을로도 보인다.

 

맥가리 : 귀원 부근에 있는 마을로 인도인들이 거주한 흔적이 있는 동네이다. 인도인들이 즐겨먹는 음식은 카레이다. “카레먹는마을에서 유래된 지명이 먹카레(맥카레) 맥가리로 불리던 곳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인도인들의 후손이 사는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시대의 인도는 대단한 선진국이었다. 신라의 고승 혜초스님도 인도로 유학 가서 선진문물을 배우며 왕오천축국전을 기술하셨듯이, 그 당시의 인도는 불교문화가 전성기를 이루어 선진문화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인도음악을 들어보면 우리의 민요가락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때에 수입한 문화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지금도 남인도 지역 드라비다족이 사용하는 타밀어단어 중 1800개가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과 동일한 발음과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경상도 사투리와 뜻과 발음이더 가까운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미나리골 : ‘정뱅이뒤의 고숙골을 지나 정정골사이의 골짜기 지명이다.

이곳 향토 주민들은 미나리골이라고 미에 악센트를 주고 부른다. 아마도 가야시대에는 바로 옆 고숙 골에 군사훈련장이 있었으니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훈련관들과 훈련생이 집단 거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미() 나리(당하관 벼슬아치 지칭) “아직은 벼슬아치가 아닌 사람들이 거주하는 고을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멸라(滅羅)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신라장수 이사부가 습격하자 대벌에서 큰 격전을 벌이던 대가야 군이 패하여 강을 거슬러 정뱅이 본진까지 후퇴하여 교전하다가, 마지막으로 밀려나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전멸한 곳이라는 설이다. 이곳에서 주력군이 항전을 하는 동안 대가야 왕과 귀족들은 낫질골짜기를 지나 미숭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다가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신라에 병합된 후 진골세력으로 등장한다.

 

또한 이 골짜기는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 동학군이 은거하던 곳인데, 토벌군이 한밤에 들이닥쳐 주살을 시작하자, 남자들은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한밤중에 야로까지 도망갔다고 한다. 이때 생겨난 말이 고령 놈은 벗겨놔도 30리를 도망간다.” 는 말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숙박들 : 정뱅이 마을은 윗 정뱅이와 아랫 정뱅이로 나뉜다. 윗정뱅이 앞들을 숙박(宿泊)들이라 부르는데, 아마도 회천을 거슬러 올라온 배가 날키에서 배를 동려 낫질 천으로 들어오면 너른 호수()가 있는 이곳에, 타국이나 타지의 상인들이나 외국의 사신들이 배를 대고 숙박했던 곳으로 보인다. 숙박들 서쪽에는 정뱅이에 주둔하는 군부대의 요채가 전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까지 고령고을에 한양에서 손님들이 당도하면 호수가 경치가 좋은 이곳에서 쾌빈정을 지어 환대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쏘안들 : 아랫 정뱅이 마을에서 옴뱅이를 바라보고 오른쪽 들을 쏘안들이라고 부른다. 1938년 병자년 수파 때에 낫질강의 물길이 바뀌기 전에 정뱅이 마을 앞에 소()가 있엇으니 쏘의 안쪽에 있는 들녘이니 쏘안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에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선박들이 정박하고 하역을 하였을 것이며 쏘 옆에는 숙박시설이 있었을 것이니 숙박들이라고 했을 것이다.

 

시뮬레이션 (simulation)

위의 지명에 대한 가설과 추정이 가능한지 시뮬레이션을 한번 가동해보자.

 

삼국시대에는 저 멀리 아라비아 지방과 인디아, 일본, 중국 등지의 상인과 교류한 흔적들이 고분발굴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증명되고 있다. 철기문명이 발달한 가야지방의 왕국들도 이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은 당연한 논리이다.

 

오뉴월 장마가 끝난 낙동강은 물이 불어나서 배가 드나들기 좋고, 하류에서 중국의 비단이나 인도의 향신료나 아라비아의 금세공품 등을 가득 실은 무역선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객기에 정박을 한다. 이들은 객기에 머무르며 음식을 사먹고 휴식을 취하면서, 대가야국의 정보를 들은 후에 길잡이의 안내를 받으면서 배를 틀어 모듬내(회천)’를 거슬러 대가야국으로 들어온다.

배는 용머리산을 지나고 바람골’ ‘도진을 지나고 반운을 지나니, ‘알터에서 무역선의 입국과 검문을 받으라는 수군들의 통제신호가 온다.

 

무역선은 알터에 배를 정박하고 대가야국 관리들이 승선하여 입국목적과 선원한명씩 검문을 받았다. 검문을 마친 배에 긴 장대를 든 솟고질하는 인부들이 승선한 후 교역소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데, 배의 왼쪽에 서쪽에서 합류하는 안림천이 나타난다. 안림천과 회천이 만나는 모듬내 강가에는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어서 수군들의 경비가 엄하다. 길잡이의 안내에 따라 회천으로 향하는데, 배의 왼쪽에는 넓은 늪지대가 나타나고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그 숲에 황새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운다. 이 늪지대(황새들) 넘어 우뚝 선 주산기슭에 대가야국 왕궁이 있다고 한다.

 

모듬내를 지나 회천으로 접어들자 물 흐름이 빨라지는 여울이 나타나고 알터에서 승선한 장대 잡이들이 장대를 강바닥에 대고 배를 밀어 올리는 힘겨운 솟고질(솟질)을 시작한다. 금산아래 물 흐름이 완만한 넓은 강가에 도착하여 배를 정박하자 대가야 상인들이 승선하여 무역품들을 살피고는 대가야인 들의 물품과 교역을 시작한다. 거래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배에서 내리는 물품은 금산기슭 창고로 옮겨간다. 대가야의 물품을 실은 배는 방향을 돌려 하류로 향하여 나아간다.

 

이때 교역선 옆으로 왜국에서 온 사신들을 태운 배가 대가야 수군의 안내를 받으며 왕궁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 사신을 태운 배는 비릿한 냄새가 나는 어촌마을(어부실)을 지나자마자, 강물줄기가 빙빙 돌아 노잡이들이 애를 먹는다. 사신을 태운 배의 왼쪽으로 무성한 늪지대의 숲이 나타나고, 강가에 대가야국 수군들의 배와 깃발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수채(옴뱅이)가 보인다.

수채 뒤와 옆에는 무성한 개울 숲과 기름진 들판이 보인다.

 

북으로 향하던 배는 물돌이가 심한 합수지역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내곡천(낫질강)으로 향한다. 배의 양쪽으로 넓은 들판이 나타나고 들 너머에는 우거진 숲이 나타난다. 숲을 향하여 배가 나아가자 마침내 큰 소()가 나타나고 그곳에 배를 정박하고 상인들과 사신일행은 하선을 한다. 상인들은 호수가 숙박채에 머물고, 사신일행은 소()건너 서쪽 숲 너머 산기슭에 군사들의 즐비한 병채(兵寨)와 요란한 깃발을 흘깃 보면서 병사들의 함성이 쩡쩡 울리는 곳을(정뱅이) 지나간다. 오랜 장송이 우거진 숲길을 지나 남쪽 길로 접어들자 오른쪽 산(꼭두뱅이) 위에 대장군의 기치와 성채가 온 산을 뒤덮고 있다. 잔뜩 주눅이 든 사신일행이 서남방 길로 나아가니 주산 기슭에 나타난 대가야의 장엄한 왕궁이 나타난다.

 

여기까지 어설픈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 거의 추정은 맞아 돌아간다. 문제는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숨겨진 지명들이 얼굴을 내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누가 이들의 나타나지 않은 이야기를 밝혀내느냐 하는 것이다. 고령의 문화는 보다 깊게, 사라진 대가야왕국을 중심으로 그 흔적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조사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심하게 포크레인으로 파버리고 밀어버리는 그 자리에 엄청난 숨은 이야기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은 전해오는 이야기와 지명과 장소에 가서, 가만히 눈을 감고 그때 시절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가야의 빛이 보이고 스토리가 들려올 것이다. 나는 간절하게 대가야왕국 시대의 storyteller가 깨어나길 바랄 뿐이다. 일본은 없는 스토리도 만들어 내는데 우리는 잊혀 진 스토리를 기억해내고 찾아내면 된다. 그가 깨어나면 대가야는 향후 수 백 년은 그 스토리 덕분에 먹고 살아 가기에 충분할 것이다.

마치 로마가 망해버린 로마왕국의 스토리를 팔아먹고 사는 것처럼.

 

이석배(landbs@naver.com)

 

 

 

 

 

 

 

 

 

 

 

 

 

 

 

 

고령인터넷뉴스 (grsj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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